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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2세들이 주인공 되도록 1세들이 밀어줘야" 심재길 전 뉴저지한인회장

뉴저지주에서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부터 1980년 사이다. 처음에는 뉴욕시 맨해튼 32가에서 사업을 하던 경제인들이 열차를 이용해 쉽게 오갈 수 있는 저지시티에 정착을 했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는 포트리와 팰리세이즈파크 등 버겐카운티 지역이 각광을 받았다. 이 시기 뉴저지에 들어와 사업을 시작해 토대를 만들고 주요 단체장을 맡아 초기 한인사회 기틀을 잡은 1세대 원로들이 여럿 있다. 심재길 전 뉴저지한인회장도 그 중 한 명이다. 심 전 회장은 현재 200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통상 분야의 젊은 기업인들 육성에 힘쓰고 있는 뉴저지경제인협회도 창설해서 1대와 2대 회장을 맡았다. 또 뉴저지테니스협회를 창립해 한인사회 체육 진흥에도 큰 역할을 했다. 현재는 두 아들과 함께 파라무스와 알파인 두 곳에서 대형 음식점 기꾸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 미국에 온 것은 1970년 2월인데 초기에는 맨해튼에서 식당을 하다 1980년대 들어 뉴저지로 왔습니다. 현재 포트리에 있는 동방그릴 자리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때는 한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현재 팰팍에서 그랜드가구점을 하고 있는 남완희 사장이 1980년대 중반쯤 사업을 시작하면서 저하고 만나 사업에 대해 의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들어 온 다음에 5년 정도 지난 후에 남 사장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남 사장은 팰팍에 초기에 자리를 잡고 타운정부의 타민족과 한인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봉사했습니다. 또 내가 뉴저지한인회장을 맡아 일할 때도 많이 도와줬습니다." 심 전 회장은 레스토랑 사업에 매진하는 한편 한인사회 발전에 힘을 보태야겠다는 각오로 1980년대 후반에 뉴저지한인회 15대와 16대 이사장, 그리고 17대 회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뉴저지에 여러 지역 한인회가 있었습니다. 뉴욕은 뉴욕한인회가 중심이 됐는데 뉴저지는 서부와 중부, 남부, 중앙, 애틀랜틱 등 5개 한인회에다 좀 나중에 북부뉴저지한인회가 만들어져 6개 한인회 체제로 운영됐습니다. 이후에 북부뉴저지한인회는 뉴저지한인회로 바뀌었습니다. 그 때는 뉴저지에 사는 한인들이 뉴욕한인회와 가까워서 뉴욕한인회장을 하곤 했습니다. 변종덕 전 회장, 조병창 전 회장 등이 그런 분들입니다." 심 전 회장은 뉴저지한인회 이사장과 회장을 맡으면서 당시 한인사회를 이끌던 이영빈 전 회장, 서의수 전 회장, 박동근 전 회장 등과 함께 럿거스대 한글학과 지원 사업 등 한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 사업에 합심 노력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까지 뉴저지한인회는 매년 6만 달러씩을 모금해서 럿거스대 한글학과 발전기금으로 지원했다. "지금은 1년에 한글학과에 1000명 가까이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때는 우리가 도와줘야만 운영이 됐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태권도를 하셨던 박동근 전 회장인데 다른 분들 모두 다 한 마음이 돼 열심히 돕고 사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심 전 회장은 한글학교 지원 사업과 함께 기억에 남는 것은 뉴저지테니스협회를 창립하고 후원한 것이라고 말한다. 테니스협회는 한인회와 경제인협회 활동과는 다르게 2세 자녀들과 가족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각별히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한인 가정의 2세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디 갈 데도 없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부모들은 돈을 벌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잠자고 눈만 뜨면 나가야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땀도 흘리고 운동도 해야 되는데 이게 잘 안됐습니다. 또 당시에 아시안 테니스 선수인 마이클 챙이 메이저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테니스 붐이 일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1988년 무렵인가 싶습니다. 테니스협회를 만들었더니 다들 좋아했습니다. 테니스는 가족들이 다 같이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은 운동입니다. 대회를 한 번 하면 펜실베이니아주나 뉴욕 등 여러 곳에서 와서 큰 대회를 했습니다. 대회에는 200명씩 참가해서 하루에 3게임씩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활동도 더 활발하고 대회도 더 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세들이 테니스 치는 게 보기 좋아서 3000달러짜리 트로피도 만들고, 5000달러씩 장학금도 만들어주고 했습니다. 나도 그 때 아이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고 운동하다 햄버거 하나 코카콜라 하나 놓고 앉아서 점심을 먹던 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과 정 때문에 아들들이 지금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추억을 이야기를 하면서 심 전 회장은 이제 앞으로는 2세들이 미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자신과 같은 1세들은 뒤에서 밀어주고 후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동포들이 뉴저지한인회 등 동포단체들을 사랑하고 이를 잘 활용해서 한인사회 권익을 향상시키는 지혜로운 생각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람은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남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한인 2세들은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고, 1세들은 이미 끝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2세들한테 넘겨줘야 합니다. 이제는 뉴저지에서도 선거에 나서는 한인 정치인들이 많이 나왔는데 한인회와 같은 단체나 추석잔치 같은 행사를 잘 활용하면 좋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이나 실력 있는 사람들이 한인들하고 친구가 되려고 이런 단체나 행사 때 옵니다. 이런 것을 잘 활용해서 2세들이 나서서 잘하고, 1세들은 뒤에서 화합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2세들이 미국사회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1세로서는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심 전 회장은 자신이 일생을 통해 집중하고 일궈온 요식업 분야에 대해서도 후배들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며 조언을 한다. 요즘 K팝 선풍과 함께 한국음식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앞장 서서 활약할 요리사나 음식점 경영인 등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인 것이다. "남들은 내가 큰 레스토랑을 두 개나 해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공의 비결은 돈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먼저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만족감과 즐거움을 갖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저하고 같이 일하는 분들은 보통 20년, 30년 일한 분들입니다. 일 그만 둔다고 하면 왜 그만두냐고 물어보고, 다른 일 한다면 내가 될 일인지 안 될 일인지 봐주고 안되면 나하고 평생 같이 일하자고 합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면서 남에게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돈은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만큼 가지는 것입니다. 돈에 관심 끄고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한편 심 전 회장은 가정을 잘 일군 것으로도 주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명문대를 나온 뒤 각각 알파인과 파라무스 기꾸 레스토랑을 맡고 있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10-04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토종 한국인'이 만들어낸 미국 스타트업 신화…건강·운동 앱 '눔(Noom)' 정세주 대표

2012년부터 3년 8개월간 구글플레이 스토어에서 건강.운동 어플리케이션(앱) 매출 1위를 기록하고,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당뇨예방 프로그램을 수주해 '앱 사용비 보험 수가 적용 대상'이라는 새로운 판도를 개척하고 있는 눔(Noom)은 유학 경험은커녕 한국에서 다니던 대학에서도 중퇴한 '토종 한국인' 정세주 대표가 절박함과 진솔함으로 일궈낸 스타트업(Start Up)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해 사용자를 위해 자신만의 식단과 다이어트 스케줄을 짜주는 '라이프 스타일 코치' 앱 눔은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무려 4500만이 넘는 다운로드 횟수를 자랑한다. 올해 매출액만 5000만 달러가 넘는 눔은 지난해에는 CDC의 당뇨 예방사업(Diabetes Prevention Program.DPP)에 채택돼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서비스국(CMS)을 통한 보험 수가 적용대상으로 선정, 프로그램 개시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정 대표는 암 전문의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을 모두 암으로 잃고 나서 2002년 재학 중이던 홍익대학교를 중퇴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에서도 '대기업 취업'에 매달리기 싫어 희귀 음반 판매 사업을 하며 수익을 올리고 있었지만 한국 시장이 생각보다 빨리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판단돼 사업을 접고 미국행을 택했다. 큰 꿈을 가지고 뉴욕에 도착한 정 대표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뮤지컬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사기를 당해 젊은 나이에 3억 원에 달하는 빛 더미에 올라앉고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사업 실패 후 한국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다는 그는 "대학 중퇴라는 어마어마한 배수진을 치고 뉴욕행을 택했기에 돌아갈 수 없었다"며 "대신 아르바이트로 때수건, 방향제등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헬스케어 앱을 구상한 정 대표는 2007년 당시 구글 수석 엔지니어였던 아템 페타코브와 창업을 했지만 처음엔 자본 부족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느라 체중이 크게 감소했다는 정 대표는 어려운 시절 되려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돈이 없어서 할렘에서 쫄쫄 굶으며 살았지만 틈날 때면 저렴한 맥주를 사 들고 가서 유럽에서 이민 온 동네 친구들이랑 어울리던 시간이 되려 영어회화에도, 문화 차이 극복에도 도움이 됐다"는 정 대표는 "그때 어울리던 친구들로부터 자존감을 높이고 남을 평가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절박함과 진솔함'을 꼽는다. 투자자 유치를 위해 참석했던 네트워킹 이벤트가 "처음에는 배 속에 쥐가 날 정도로 고역"이었다는 정 대표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말문이 막혀 쭈빗거리거나 서로 다 아는 투자자들과 기업가 사이에서 멀뚱하게 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단칼에 투자를 거부한 사람도 다시 찾아가 피드백을 요청하면 오히려 친절하게 조언을 주는 모습에 용기를 얻었다. "여기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하지,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잘 들으려는 노력은 별로 안 하는 것 같다"고 느낀 정 대표는 '투자 받기는 틀렸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뭘 고치면 되겠냐는 질문으로 진솔함을 내비쳐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의 조언으로 사업 계획을 다듬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과 면담하는 것을 보고 "영어를 예쁘게 하는 건 중요하지 않구나"라고 느꼈다는 정 대표는 그 후 보다 편안하게 사람을 대하기 시작했고 투자자와 이야기하는 나름의 패턴도 익혔다. 그는 "내가 정치하는 사람도 아닌데 버락 오바마처럼 말 할 필요 없잖아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털털하고 친근한 인상의 정 대표와 달리 그의 회사 눔은 공격적이고 빠른 변화를 추구한다. '런·빌드·메져(Learn·Build·Measure)'로 칭해지는 눔의 사업전략은 매주 새로운 아이디어를 배우고(Learn) 직접 재연(Build)해 본 후 사업 가치를 측정(Measure)하는 절차를 통과한 아이디어만을 실행에 옮긴다. "스타트업 특성 상 새로운 아이디어는 계속 쏟아지는데 그걸 다 실행에 옮길 수 없으니 빠른 실험을 통해 걸러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격변하는 앱 사업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우선주의'다. 우리는 돈만 주면 앱을 만들어주는 앱 에이전시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정 대표는 실제로 미국의 큰 기업들과 사업을 할 때도 사업 계획서에 "귀사의 필요에 따라 앱을 변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는다고 했다. 계약에 눈이 멀어 고용주의 의견만 듣다 보면 실제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편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는 것이 정 대표의 신념이다. "아파트 시공사가 아무리 예쁘게 집을 지어 놓았대도 실제로 부엌을 둘러보면 주부 입장에서 부족한 것이 많듯, 앱도 유저의 피드백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것이다. 눔은 앱 디자인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코칭에서도 유저 입장을 먼저 고려한다.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치킨.맥주 먹으면 안 되는 거 몰라서 먹는 것 아니잖습니까"라고 반문하며 그가 입을 뗐다. "열심히 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상황이 어려워서, 혹은 동기부여가 부족해서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한테 계속 지적질과 비난만 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이런 그의 신념은 기업 대상 세일즈에 대한 고민도 해결해 줬다. 정 대표는 "앱 시장은 실사용자 사이에서 인정 받으면 B2B(business to business·기업 간 업무)가 자연스레 따라온다"며 "기업 대상 세일즈 팀을 따로 두지 않아도 협업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눔은 사용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지난 2016 년부터 500명이 넘는 라이프스타일 코치를 고용해 사용자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사용자들을 코치하는 서비스를 새로 도입했다. "저렴한 가격대에 일괄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던 기존의 전략보다 멤버십 요금은 높아졌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라고 한다.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는 코치가 개별 사용자들과 모바일 환경을 통해 매일 연락하며 관계를 형성하기에 그에 따른 체중·건강 관리 결과도 월등히 좋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개별 관리 시스템의 기반을 닦은 눔은 올해 들어 SNS.TV광고 등을 통해 전통적인 다이어트 업체들과 전면 대결에 임했다. 정 대표는 "얼마 전에는 오랜 역사의 웨이트 워처스(Weight Watchers)의 CEO가 직접 전화해 광고 게재 중단을 요청했다"며 자랑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앞으로 헬스 앱 시장 전망에 대해 정 대표는 매우 낙관적이다. "우리가 업계 1위라고 해도 현재 미국시장의 사용자 수는 전미 과체중 인구의 0.2%에 불과하다"는 정 대표는 "앞으로도 성장할 기회가 많다고 믿는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는 CDC와 당뇨예방 프로그램을 준비한 경험을 토대로 고혈압·신부전증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김아영 기자 kim.ahyoung@koreadailyny.com

2018-10-03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힘있고 자랑스런, 함께하는 '옥타'위해 뛰겠다" 하용화 전 뉴욕한인회장

1980년대 중반부터 각종 봉사활동에 나서 한인회·보험협회·청소년재단 회장 등 맡아 떠나간 딸 이름 재단 설립 정신건강 교육도 하용화 전 뉴욕한인회장은 이달 경남 창원에서 열리는 제20대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World OKTA)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현재 월드옥타 미동부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 회장은 월드옥타 뉴욕지회 이사장, 정관개정위워회 부위원장,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그는 “옥타 회원으로 활동한 지는 비록 6년이지만 그간 누구보다 옥타와 대한민국 경제 공생·발전 방안 모색에 주력해왔다”며 “74개국 146개 지회를 둔 세계 한인 무역인들의 대규모 네트워크인 월드옥타의 위상을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 중소기업 해외진출 지원 ▶차세대 글로벌 창업 육성 ▶청년 일자리 창출 지원 ▶월드옥타 내실 강화 ▶회원·기업·기관 소통과 홍보를 통한 월드옥타 위상 강화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각 지회 친목·네트워크 강화 및 지회 특성에 맞는 비즈니스 지원을 통해 옥타 내실을 다지고, 지방 자치단체와 옥타 경제인을 위한 홈커밍 프로그램을 도입해 지역 중소기업의 해외진출 기회 등을 모색하며, 대학과 제휴해 차세대 취업·창업 지원 사업을 강화하는 등 옥타의 발전적인 미래에 적극 나서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특히 지난 15년간 월드옥타가 주력해온 차세대 글로벌 인재 양성 사업이 보다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차세대 무역스쿨’ 졸업생의 정회원 가입을 유도하고, 인재 데이터 뱅킹 및 옥타 해외 회원·기업 구인 희망 데이터 구축 등을 통해 해외 일자리의 실질적인 매칭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전했다. 이와 함께 해외 74개국에 포진된 옥타 장점을 살려 해외 취업과 이민법에 관한 법률 정보를 성문화해 실시간 정보 제공에도 힘쓰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그는 “1981년 창립된 월드옥타 37년 발자취를 우리 차세대 후배들에게 넘겨주는 교량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자 한다”며 “지난 30여 년간 한인 이민 1세대로서 지역 커뮤니티 발전과 한인사회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던 봉사 경력을 바탕으로 이제는 전 세계 무역인의 미래를 위해 뛰겠다”고 강조했다. 하 회장은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플러싱한인회 부회장, 대뉴욕지구한인보험재정협회 회장, 뉴욕한인직능단체협의회 의장, 뉴욕한인회 회장, 미주한인청소년재단 회장, 재외동포재단 해외자문위원, 에스더하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커뮤니티 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대 미국에 유학생으로 온 뒤 역경을 극복하고 솔로몬보험그룹 대표로 성공하기까지 봉사활동은 그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특히 2014년에는 우울증을 앓다 세상을 떠난 딸 에스더의 이름을 딴 ‘에스더하재단’을 설립해 우울증 바로 알기 캠페인, 자살 예방 프로그램, 응급처치 프로그램, 힐링 콘서트 등 커뮤니티의 정신 건강을 위한 교육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인 2세대들의 멘토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차세대 한국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돕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K-Move’ 멘토로 활동하며 젊은이들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을 위한 길잡이 역할도 해냈다. 또한 미주한인청소년재단 회장으로 일하면서 한인 2세대들의 뿌리 교육과 미 주류사회 성공적인 진출을 돕고 멘토링 시스템 구축은 물론 차세대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통한 리더십 교육을 실시했다. 하 회장은 “유학생 신분으로 시작해 솔로몬보험을 설립하기까지 한인사회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가족과 지인, 동포사회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활동이지만, 이제 여기서 찾는 삶의 기쁨과 보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오랜 봉사 경력은 다양한 수상 경력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는 재외동포재단 해외자문위원직을 수행하며 재외동포의 실상을 한국 유수기관에 알리고, 미주한인청소년재단 회장 재직 시 한인 청소년 육성 및 정체성 찾기 등 동포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미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이민자와 지도자들에게 주는 ‘엘리스아일랜드 상’을 받기도 했다. 또 2002년 아시안아메리칸기업개발센터(AABDC) ‘올해의 우수 아시안 기업인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뉴욕한인회장직을 수행하며 한인회관에 한국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공간을 만들고, 뉴욕한인회 50년사를 편찬하는 등의 공로로 재외동포신문인 ‘월드코리안’이 선정하는 ‘2010 월드코리안 대상’ 문화부문 수상자로도 선정된 바 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대신할 수 없는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다. 나의 경우는 이 아픔과 어려움을 커뮤니티 봉사활동으로 이겨냈다. 자칫 이웃과 삭막한 관계로 살기 쉬운데 좀 더 남을 배려하는 여유와 커뮤니티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거기서 보람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제 커뮤니티를 위해 발로 뛰던 내 열정과 쌓아온 경륜을 전 세계에 포진한 무역인의 위상을 높이는데 쏟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koreadailyny.com

2018-10-01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한인사회 위장 건강, 모두 함께 지켜야죠" 현철수 내과전문의·아시안아메리칸 위암 태스크포스 회장

'속편한 내과' 너무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뉴저지주 잉글우드에 있는 위장내과전문의 현철수 박사의 클리닉 이름이다. 1973년 미국에 유학을 와서 존스홉킨스대 학부생활을 시작으로, 의대, 생물리학 박사, 박사후 연구원, 전문의 과정들을 20여 년 간에 걸쳐 마친 현 박사는 지난 25년 동안 한인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해 온 의료인이다. 현 박사는 소화기내과 분야의 진료와 치료에 정통한 전문의일 뿐만 아니라 위장질환 및 바이러스성 간염 등과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강연 활동을 하고, 또 한인 전문의와 의학자들과 함께 다양한 단체와 조직을 만들어 사회활동을 해 온 의학 운동가이기도 하다. 현 박사는 재미한인의사회(Korean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회장을 역임했고, 2012~2015년에는 세계한인의사회(World Korean Medical Organization) 초대회장으로 한국과 외국 주재 한인 의사들의 유대를 활성화했다. 지식 및 정보의 교류 및 후학 양성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전 세계 한인 의료인들이 만날 수 있는 글로벌 환경을 구축하는 데 주력해 오고 있다. "여러 가지 활동이 있지만 한인으로는 유일하게 'New Jersey State Board of Medical Examiners'의 보드 멤버로 뉴저지주 의료 감독관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 비영리기관 바이러스 간염연구센터(Center for Viral hepatitis)를 설립해 바이러스 간염, 간암 및 만성 간 질환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나아가서 문화, 인종적 격차에서 오는 글로벌 의료의 불균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현 박사는 최근 뜻 있는 의료 전문가들과 함께 한인은 물론 일본인과 중국인 등 아시안 아메리칸에게 흔히 발병하는 위암의 실상과 예방, 치료방법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시안아메리칸 위암 태스크포스(AASCTF: Asian American Stomach Cancer Task Force)'를 결성하고 회장 직을 맡았다. AASCTF는 오는 10월 6일 포트리에 있는 더블트리호텔에서 위암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창립 포럼을 연다. 현 박사는 AASCTF 창립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AASCTF의 미션은 위암 발병률이 높은 한인 및 아시안 아메리칸들에게 위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늦어도 40세 이상은 2년 마다 위 내시경 검진을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1차적으로 추진할 사업은 한인사회에서의 위암 바로 알기 캠페인입니다. 뉴욕과 LA, 애틀랜타, 시카고, 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의 한인 커뮤니티 리더들과의 협력을 통해 캠페인을 열 수 있는 플랫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위암 예방과 조기검진 및 일반 건강증진 관련 교육 및 임상연구 개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인으로만 한정하기 보다는, 좀 더 포괄적으로 위암 발병률이 높은 여러 민족들을 아우르기 위해 전 미주 아시안아메리칸으로 명칭을 정했다는 현 박사는 현재는 한인 커뮤니티에서 시작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 일본, 베트남 및 여러 아시안들을 포함할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10월 6일 열리는 창립포럼에는 아시안 아메리칸 위암 분야의 권위자 5명이 발표를 하고, 타운홀 미팅 형식으로 질의 문답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영어로 진행되지만 한인들이 많이 참석하면 한국어도 같이 사용할 예정입니다." 현 박사가 개업의로서뿐만 아니라 책으로, 강연으로, 또 건강 캠페인을 통해 위암의 위험성과 조기치료 등에 대해 알리려 노력하는 것은 한인들에게 위암이 너무나 위험한 질병이기 때문이다. "위암은 한국인 남성 암 발병률 1위입니다. 한국은 위암이 발견돼도 생존률이 70%인데 비해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불과 30% 정도밖에 안됩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인에게 위암은 각종 암 발병률 순위에서 남성에게는 12위, 여성에게는 17위 입니다. 미국인에게 가장 많이 발생하는 대장암이나 유방암 같은 경우 정기적인 진료를 권장하는 것은 물론 검사에 해당 될 수 있는 디덕터블과 코페이 면제 등의 혜택도 주고 있지만 위암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한국과 미국의 의료격차 때문에 위암 스크리닝 검진이 정기적으로 시행되지 않다 보니, 병이 있는 경우 늦게 발견돼, 결과적으로 생존 비율이 극히 낮아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위암을 찾아내는 방법은 아직까지 내시경 검사가 가장 효과적인데 한국은 40대 이상 성인의 경우 70%가 검사를 받는 반면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이 보다 한창 처질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 박사는 위암과 관련해 한인들이 미국에서 겪는 여러 가지 우려할 상황에 대해 지적하면서 한인들 모두 각자가 위암 발병을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 차원에서 건강관리와 더불어 정기검진은 필수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성인병은 생활습관병입니다. 생활습관이 나빠지면 병이 올 수 있습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비정상적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서 생기는 병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활습관을 가지고 살면 이로 인해 우리가 물려받은 건강한 유전자에 까지 이상이 생길 수가 있지요. 생활습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식습관과 운동입니다." 정기적인 운동을 하고, 규칙적으로 잘 먹고, 충분한 수면 그리고 적절한 스트레스 조절이야 말로 모든 현대인에게 필요한 예방 원칙이라고 강조한다. 현 박사는 운동의 경우 특히 유산소 운동을 1주일에 적어도 3~4일, 1시간 정도씩 하는 것을 권장하며 체력이 괜찮으면 뛰고, 그렇지 않으면 걷는 운동도 바람직하며 아울러 한인들의 흡연과 음주문화가 적극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음식도 각종 식품에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섬유질, 미네랄 등이 다 함유돼 있지만 현대 음식에는 섬유질이 감소 추세라 동물성 지방 섭취를 줄이면서 과일과 야채, 곡류 등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몸에 좋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며 정신적인 훈련이 중요한 것 같다"며 자신은 "마라톤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고 밝혔다. 현 박사는 이러한 생활 습관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성인병들을 예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이 지향하는 예방의학의 방향성과 상통한다고 지적한다. "현대의학은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앞으로는 예방의학을 중심으로 발전 할 것입니다. 독감에 걸리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앞으로의 의학은 병의 유발 가능성을 예상하여 미리 예방 조치하는데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또한 유전병을 치료할 때도 유전자 의학을 적용하는 예방의학으로 가는 추세입니다." 위암 예방 및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제시한 개개인의 생활습관의 개선은 결국 이러한 예방의학의 기초적인 출발이자 토대라는 현 박사의 설명이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09-28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꿈을 갖고 의료산업에 적극 진출하세요" 최경희 홀리네임병원 부원장

뉴욕·뉴저지에 한인 의사들이 처음 자리를 잡은 시기는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부터다. 당시 한국은 한창 경제성장에 몰두하던 시절로 물질적 문화적으로 모든 게 부족했기에 고급 인력인 의사들이 적지 않게 미국으로 왔다. 한인 의사들이 처음 미 동부에 뿌리를 내린 곳은 독립운동가이며 선각자인 서재필 박사가 활동했던 필라델피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뉴저지에 정착하는 한인 의사들이 많아졌다.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에서 중진급 의사들이 들어와 뉴욕·뉴저지에 자리를 잡았고, 이어 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1.5세와 2세 젊은 의사들이 합류했다. 한인 의료인들은 지난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면서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뤘다. 뛰어난 한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미국 의료시설과 지역사회에서 활약하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뉴저지 곳곳에 한인들이 운영하는 복지시설들도 늘어났다. 이 중에서 특기할 성과 중 하나는 뉴저지주 티넥에 있는 홀리네임병원에 있는 코리안메디컬프로그램(KMP)이다. 파스캑밸리병원에서 5년, 이어 홀리네임병원에서 10년, 총 15년 동안 운영된 KMP는 다인종 국가로 변화하는 미국의 의료현실에 부합하는 최상의 맞춤 프로그램으로 의료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KMP를 이끌고 있는 홀리네임병원 최경희 부원장은 프로그램의 성공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일반적으로 그 동안 미국 의료계에서는 환자를 그냥 환자로 봤습니다. 소수계 환자들의 경우에는 언어와 문화 차이가 있어 효과적인 진료와 치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한인들의 경우에는 이런 장애 때문에 병원의 문턱이 높았는데 KMP는 이러한 어려움을 맞춤형 의료서비스로 극복함으로써 환자 유치는 물론 병원의 성장을 이끄는 등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홀리네임병원 KMP가 주목을 받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환자를 병자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관심과 존중을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병원이나 의료진이 환자, 특히 소수계 환자를 보고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변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극대화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KMP를 통한 획기적인 변화로 홀리네임병원 한인 환자 수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1000명에서 4만 명으로 무려 40배나 늘었다. 한인 환자들을 위한 맞춤 의료 서비스가 전체 병원의 성장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미국 각지의 유수 의료기관에서 홀리네임병원과 KMP를 벤치마킹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최 부원장이 KMP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의 성장배경과 마음을 비우고 남을 돕겠다는 신념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경상북도 예천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최 부원장은 조부모님과 부모님, 6남매에 농사를 돕던 일꾼들까지 거느린 대가족 가운데서 자랐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남동생과 함께 서울로 유학 온 최 원장은 취업과 사회진출을 위해 실업계 서울여상으로 진학했고, 야간대학에서 영문학, 다시 서울 용산에 있는 메릴랜드대학에서 비즈니스와 회계를 전공했다. 이후 JP모건 한국지사에 경리과 과장으로 취업해 한국, 싱가폴, 미국에서까지 25년간 근무하다 9·11테러 사태를 목전에서 지켜 본 뒤에 은퇴했다. 최 부원장은 은퇴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9·11테러 당시 저는 월스트리트 사무실에서 트윈타워의 참사를 목도했습니다.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그 일을 계기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내 개인의 성취와 발전을 위해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고 그래서 내가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제는 내가 받은 것을 사회로 환원하며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고, 이후 사회봉사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은퇴한 최 원장은 본인이 거주하는 해링턴파크의 교육위원과 파스캑밸리 병원 이사를 맡는 등 봉사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많은 한인들이 병원을 이용할 때 언어와 문화의 다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돕기 위해 KMP를 출범시켰다. 최 부원장은 "KMP를 통해 한인들이 제대로 진료와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례가 줄어들고 수준 높은 서비스를 받게 된 것이 성과"라며 "특히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원들이 경쟁적으로 한인 커뮤니티에 눈을 돌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은 아이디어로 시작했지만 씨앗이 커지고 결실을 맺음으로써 긍정적인 임펙트가 생긴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부원장의 꿈은 한인들을 넘어 아시안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확대되고 있다. 홀리네임병원은 KMP를 아시안의료프로그램으로 확대해 한인과 함께 중국, 필리핀, 인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 출신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홀리네임병원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아시안 환자들을 위한 아시안 전용 진료센터를 만들 예정이다. "KMP가 병원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홀리네임병원이 미국 전체에서 최고 수준의 병원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 KMP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양희곤 아시안 헬스서비스 메디컬 디렉터를 중심으로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을 인정 받는 한인 전문의 90여 명이 아시안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는 것도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최 부원장은 자신의 경험으로 바탕으로 한인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전문의와 간호사 또는 의료 행정가나 의료 경영인 등 각자의 적성에 맞는 분야에 도전해 볼 것을 권했다. 미국의 의료산업이 엄청난 규모인데다 앞으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의료산업은 미국 국내총생산의 18% 정도를 차지하는 큰 시장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의료산업이 국내총생산에서 보통 10% 내지 11% 정도를 차지하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의료산업은 과거에는 치료 건수에 중점을 뒀으나 이제는 더 좋은 서비스, 더 낮은 치료비용을 들이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의료계의 현장은 소수계 의료 전문가들에게 더욱 유리한 쪽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료계는 물론 연방정부도 예방치료에 우선을 두고 비용을 줄이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어 과거에는 의료분야에서 소수계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오히려 장점을 갖고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 원장은 한인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권고와 함께 창간 43주년을 맞는 뉴욕중앙일보에 대한 덕담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지난 15년간 잘할 수 있었던 것도 뉴욕중앙일보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뉴욕중앙일보가 앞으로 계속 커뮤니티 미디어 리더로서 저희들과 함께 손잡고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09-19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AALDEF와 같은 한인 전문 비영리단체 설립이 꿈" 시민참여센터 법률대책위원장 박동규 변호사

"아시안아메리칸 법률교육재단(AALDEF)과 같은 역할을 하는 한인 이민자 권익옹호를 위한 전문 비영리단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난해부터 시민참여센터 이민자 보호 법률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동규(56) 변호사는 앞으로의 꿈을 묻는 질문에 이처럼 대답했다. 지금 대책위에 참여하고 있는 변호사들이 중견급 이상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칭) 한인 법률교육재단(KALDEF)'을 만들 역량은 충분하다는 것. 박 변호사는 "펀딩 소스만 확보된다면 KALDEF를 죽기 전에 만들고 싶다"며 인적 자원은 갖춰져 있으나 재정적으로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다른 개인적인 꿈을 묻는 질문에 박 변호사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 이상 재미있는 일은 아직 찾지 못했다"며 "지금 하고 있는 이민자보호교회(이하 이보교) 지원 활동과 시민참여센터 활동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현재 '시간이 돈'인 12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대책위가 이보교에 법률적 지원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십일조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보교 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변호사들은 모두 무료로 봉사하고 있다. 대책위는 지금까지 5건의 한인 케이스를 도왔는데, 주로 이민 구치소에 수감된 한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고 박 변호사는 전했다. 최근엔 시민권자 배우자가 체포됐으나 대책위의 도움으로 석방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최근에는 시카고·LA·조지아주 등 전국에 있는 교회들이 참여해 이보교 전국준비위원회도 결성해 앞으로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이민자 보호 활동을 강화하게 된 계기에 대해 박 변호사는 "2017년 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반이민 행정명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며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래도 미리 준비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마음에서 이민 전문 변호사 중심으로 대책위를 구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정책 전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 박 변호사의 평가다. 그는 "9.11 테러 이후 이민법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반이민 분위기의 강도는 그 때의 10배·20배"라며 "트럼프 행정부는 1965년 평등한 이민법(INA) 제정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1965년 이민법 제정 이전에는 이민자의 대부분이 백인이었으나 지금은 90% 이상이 유색인종인데, 백인 위주의 이민자만을 받아들였던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 변호사는 "트럼프 이민정책은 합법.불법을 막론하고 이민자 수를 줄이려는 것으로, 처음에는 무슬림과 서류미비자를 타겟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유학생 등 비자 소지자로 확대됐고 궁극적으로는 이민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지금의 이민정책은 인종차별적인 정책일 수 밖에 없다"면서 "현재 많은 한인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들이 이 문제를 불체자 문제로만 인식하면서 위기의식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인종혐오 범죄가 최근 급증하면서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지난해 뉴저지주 버겐아카데미에서 발생한 사건이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한인 이민자 권익옹호 활동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펀딩이 필수적이지만, 현재 시민참여센터는 전국적인 한인 풀뿌리 운동 역량 결집을 위해 워싱턴DC로 인적.물적 자원이 대거 옮겨 가면서 뉴욕·뉴저지 로컬 차원의 활동을 위한 재원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이와 관련 박 변호사는 "오는 10월 25일 연례만찬을 계기로 1인1달러 후원 캠페인을 하고 있다. 하루에 1달러, 한 달 30달러를 내는 후원자를 최대한 확보해 커뮤니티의 지지를 받는 기관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박 변호사는 한인사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민법 전문 변호사 중 한 사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누구 못지 않은 굴곡진 이민사를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커뮤니티 봉사 활동을 이어 왔다. 별도의 종교이민 분야가 없던 1981년 가톨릭 계통 취업이민 형태로 이민을 온 부모님을 따라 오하이오주에 처음 정착한 박 변호사는 미국에 온 지 두 달 만에 부친이 사망하는 어려움을 겪게 됐다. 1982년 어머니와 4형제가 6개월만 머물 예정으로 뉴욕으로 이주했다가 지금까지 살게 됐다고 박 변호사는 전했다. 그는 "어머니께서 봉제공장 미싱사, 야채가게 계산원, 할렘 커피숍의 웨이트리스 등 온갖 힘든 일을 하시며 4형제를 공부시키셨다"고 말했다. 가정형편상 대학도 당시엔 학비가 들지 않았던 뉴욕시립대(CUNY)에 진학해 퀸즈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대학 졸업에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당시 한국의 민주화·인권 상황과 관련해 뉴욕한인YMCA 부회장, 뉴욕한인대학생연합회 총무, 뉴욕기독청년연합회 회장 등 한국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위한 한인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는 천주교 뉴욕대교구 이민사무국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인 이민봉사 활동에 나섰다. 이민국이 공인한 최대 비영리단체인 천주교 이민사무국은 스태프 변호사만 55명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현재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다. 이민자에 대한 법률서비스와 이민자 권익옹호 활동이 주 업무인 이곳에서 카운슬러로 10년간 일하면서 수많은 이민자들을 위한 무료이민상담을 했다. 박 변호사는 천주교 이민사무국에서 일하는 동안 브루클린 법대에 진학해 1998년 졸업하고 2000년부터 현재까지 맨해튼에서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개인 사무실을 연 이후에도 첫 2년간은 천주교 이민사무국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했으며 이후 무지개의 집, 퀸즈한인천주교회 생활상담소 등에서 1000명 이상의 한인들을 위해 무료 상담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봉사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1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재외동포유공자 외교통상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처음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브롱스로 왔던 박 변호사는 이후 퀸즈 플러싱·베이사이드를 거쳐 뉴저지 올드태판에 머물다 현재는 팰리세이즈파크에 거주하고 있다. 주요 한인 밀집지역을 모두 거치면서 한인사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된 셈이다. 박 변호사는 현재 한인 입양인 관련 비영리단체인 세종문화교육재단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부인 줄리아 박씨와의 사이에 법대에 재학 중인 승민씨와 대학생인 상훈·종원씨 등 세 아들을 두고 있다. 박기수 기자 park.kisoo@koreadailyny.com

2018-09-18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장순길 장스타태권도 관장 "태권도는 한국의 정신을 전해야 합니다"

뉴저지주의 한인 무도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들어온 무도인들은 대부분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가라데와 합기도, 검도 등 다른 무도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태권도였다. 태권도의 원로 1세대들이 뉴욕.뉴저지 인근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한인 무도사의 서장을 열었다. 이후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뉴저지 곳곳에서도 한인 사범들이 자리를 잡고 미국인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생존하고 있는 원로들 중에 미국 어느 지역 어느 곳에서 몇 명의 한인 관장과 사범들이 미국인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재 태권도계에서 중진급으로 자리를 잡고 활약하고 있는 2세대들이 도장을 만들고 제자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지난 1990년 저지시티에 태권도장을 만들고 주류사회 속에 들어가 태권도를 전하면서 한국인의 문화와 얼을 심어 온 장스타태권도장 장순길 관장(태권도 국기원 공인 8단. 합기도 공인 7단)은 미국에 한국 태권도의 꽃을 피운 대표적인 무도인이다. 장 관장은 처음 저지시티에 자리를 잡고 도장을 연 뒤 지속적으로 제자양성과 커뮤니티 아웃리치를 통해 한국의 무도와 정신을 전파했다. 허드슨카운티 셰리프국 무술 지도를 담당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는 장 관장은 지난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유단자 수백 명을 포함해 1만5000여 명 제자를 가르쳤다. 특히 생활이 어려운 지역 주민과 청소년들을 위해 무료 태권도 강습을 여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 노력에 힘입어 지금은 교사, 대학교수, 의사, 정치인 등 많은 제자들이 태권도 정신을 바탕으로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고 있다. 장 관장은 처음 저지시티에 장스타태권도장을 만들고 개척할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저지시티에 처음 자리를 잡을 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이 다들 느끼듯이 언어와 인종차별로 인해서 힘든 점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장 관장이 처음 도장을 열었을 때 시비를 거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이를 악물고 제자를 양성했고 이러한 노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믿음이 생겼다. 안으로는 여기서 주저 앉으면 도장 문을 닫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감도 작용했다. 장 관장이 스스로 강하게 마음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시간이 가면서 제자들은 물론 부모들과 커뮤니티의 신뢰를 얻게 됐습니다. 심지어는 도장 앞에 있던 가라데 도장에 다니던 아이들도 우리 도장에 나오게 되고 나중에는 가라데 도장의 관장 아이들까지도 저에게 와서 수련을 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장 관장은 저지시티 지역사회에서 태권도를 통해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전하는 지역 인사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장 관장은 한편으로 이런 배경에 무도를 일생의 업으로 여겨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충실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제 딸이 아빠인 저를 소개하는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딸은 제가 매일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금주와 금연 등을 하면서 자기생활을 철저히 하는 것을 눈 여겨 보고 인터뷰 때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평소에 아빠를 유심히 보고 있구나 해서요."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제자 육성에 대한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미국에 태권도를 적극 보급하겠다는 장 관장의 집념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는 사이에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많은 상을 받게 된다. 한국에 KBS 9시 저녁뉴스에 소개가 됐고, 미국에서는 CH2와 CBS 뉴스에도 소개가 됐다. 장 관장은 미국에서 '태권도의 날' 제정을 주도했고 '미 육군 감사장' '범죄예방 감사장' '연방수사국(FBl) 감사장' '경찰국 감사장' '커뮤니티 헌신 표창'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각종 상과 표창을 받고 한국 국기원 박물관에 활동 사진이 전시되는 영예를 안았다. 워싱턴DC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태권도를 미국에 전했던 '미국 태권도계의 전설' 고 이준구 관장에는 미치지 못해도 지역사회에 한국의 무도와 정신을 전하고 기여하는 존경 받는 태권도인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장 관장은 이러한 길이 어렵다는 것을 체험했기에 "이준구 관장을 비롯해 태권도가 자리를 잡지 못하던 초기에 미국에 오셔서 사회 곳곳에 들어가 한국의 무도 태권도를 전한 한인 원로들 한 분 한 분을 깊이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 관장은 태권도가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태권도가 단순히 때리고 막는 격기, 포인트를 따고 경기하는 스포츠 이상의 것으로 발전해야만 앞으로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장 관장이 장스타태권도 이름으로 30년 가까이 미국에 태권도를 전한 경험과 함께 자신의 무도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태권도의 핵심을 한 마디로 집약을 한다면 '불굴의 정신' 입니다. 미국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는 여기에 효도와 인내 등을 함께 가르쳐야 합니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과 관장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삶의 멘토가 되야 합니다. 부모처럼, 선생처럼, 성직자처럼 제자들에게 인성을 가르치고 또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언을 하고 더 나아가 태권도장은 그러한 인성교육의 장이 되야 한다고 믿습니다." 장 관장은 이렇게 태권도가 격기나 스포츠의 차원을 한 단계 넘어서서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미국사회에서 전할 때 태권도가 미국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민을 오거나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면서 미국에서 열심히 사시는 분들 당연히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태권도를 하는 무도인들은 제자들에게 무도로서의 태권도와 함께 어른과 부모님과 선생님을 존경하고 이웃에 봉사하고, 성실한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인생을 사는 인성을 가르칠 때 진정으로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관장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28년 동안 크고 작은 시범행사를 하고 있는데 지난 2010년부터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이웃을 생각하자는 취지로 지역사회 모두가 참여해 태권도를 체험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시범공연을 하고 있다. 올해는 오는 29일 오후 7시, 로다이 소재 펠리시안 칼리지에서 열릴 예정인데 여기에는 장 관장과 제자들이 대거 출연할 예정이다. 시범공연에서는 각종 격파 기술과 다양한 품새, 실질적으로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호신술 등을 중심으로 일반인들이 흥겹게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멋진 태권도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펼쳐질 예정이다. 장 관장이 적지 않은 재정적 부담을 감내하면서 지속적으로 태권도를 지역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것은 무도인으로 자신이 가진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태권도가 미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로 앞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도인으로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제자들과 이웃에게는 무도인으로서의 철저한 자세를 보여줘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태권도가 사람의 인성을 바꾸고 사회를 화합하게 하는 단순 격기 이상의 정신적인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실천할 때 태권도가 미국에서 더욱 발전하고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09-17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주디 장 변호사 "이민자 힘은 막강…정의로운 사회 만들어야"

"용감한 이민자들이 타지에서 한 스텝 나아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민법 전문 주디 장 변호사는 뉴욕·뉴저지·캘리포니아주 등 미 전역에서 한인 이민자들에게 20년째 이민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장 변호사는 "도움을 받은 다수 한인들이 주류사회에서 성공해 이제는 그들이 차린 회사 직원들의 영주권 수속까지 맡긴다"며 흐뭇해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뜻으로 로스쿨 진학 후, 약 8년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헬러 로펌과 뉴욕의 헛슨 루스 로펌에서 소속 변호사로 근무하다가, 2006년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 지역에서 '제이 글로벌 로 그룹(J Global Law Group)'이란 이름으로 첫 사무실을 열었다. 2009년에는 뉴욕 맨해튼에, 3년 후 2012년에는 뉴저지에 사무실을 확장해 현재는 주디 장 로펌(Judy Chang Law Firm)으로 운영 중이다. 2002년부터는 이민 칼럼을 작성해 한인사회에 이민 정보를 제공해왔으며 '경험이 너를 만든다'라는 책도 발간했다. 장 변호사는 "과거 이민법 정보가 많지 않았을 때 칼럼 작성 추천을 받아 시작했다"며 "지난 2012년 그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이민법의 흐름, 사회 이슈를 다루는 책을 출판했다"고 전했다. 장 변호사는 현재 이민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걱정의 목소리도 내며 미국 내 이민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미국 경제성장의 3분의 2가 이민자 덕분이라는 뉴스가 나왔듯이 이민자의 힘은 막대하다. 트럼프 정부는 현실과 다르게 이민자들을 부정적인 존재로 포장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결과 최근 취업비자도 줄고 기업의 인재 발굴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 변호사는 해결책으로 "미국인들의 국민의식 발전과 지역사회 의식 발전"을 설명했다. 그는 최근 이민 변호사 업무뿐만 아니라 한인 커뮤니티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과거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이사로 활동했고 국제한인변호사협회(IAKL) 임원, 코리안아메리칸 시민운동협회(KALCA) 이사를 맡았었다. 또 지난 6년간 뉴욕 나눔재단과 한인동포회관(KCC)의 총무 이사와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한인동포회관이 "어린이.중년.장년이 어울려 문화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강조했다. 올해는 시민참여센터(KACE)의 이사로 활동을 넓혀나간다. 시민참여센터에서는 법무팀 소속으로 기존 활동 중인 변호사들과 함께 이민자 권리를 위해 땀 흘릴 계획이다. 장 변호사의 이 같은 비영리 단체 참여는 '건강한 사회가 있어야 건강한 개인이 있다'라는 신념으로 시작됐다. "어린 시절 토론토 한인상공회의소 장학금 시상식에 갔는데 부모님이 장학금 액수만큼 후원을 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모든 사람의 성공은 커뮤니티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나눔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그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말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 to raise children)"는 생각으로 한인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이민법을 넘어서 다양한 분야에 골고루 에너지를 분배해 미국사회와 한인 커뮤니티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을 "운이 좋지만 노력파"라고 설명한다. 과거 로펌 재직 시 그는 "회사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불렸다"며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 변호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캐나다 몬트리올, 토론토 등지에서 자라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정치·경제.불문학을 복수 전공 후 1997년 토론토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1년간 중국 천진과 소주 대학 등에서 국제 통상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2013년에는 이민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아시안 아메리칸 사업개발 센터에서 선정하는 '영향력 있는 아시안 아메리칸 50명'에 뽑히기도 했다. 장 변호사는 핵물리학자인 남편 안준욱 박사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박다윤 기자 park.dayun@koreadailyny.com

2018-09-14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김동석 변호사, 사고·상해 전문 변호로 한인들 지킨다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 피해를 입는 한인들이 없길 바랍니다." 15년 동안 사고.상해를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석 변호사의 바람이다. 이민 1.5세인 김 변호사가 한인과 관련된 각종 사고·상해 케이스를 전담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아주 간단한 법률 정보만 알았어도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김 변호사는 "본인이 피해자든 가해자든 어느 입장에 서더라도 기본적인 법률을 알고 있어야 바르게 상황 대처를 할 수 있다"며 "법률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가까이 하라"고 조언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든 웹사이트가 있다. 바로 그가 5년 전 개설한 무료 법률 상담 웹사이트 '방법(bangbub.net)'이다. 김 변호사를 주축으로 친분 있는 한인 변호사 6명이 함께 운영하는 이 사이트에선 형사법·가정법·교통사고·인명사고·이민법·부동산법·파산법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상담을 한국어로 무료 제공하고 있다. 한인들이 질문을 남겨두면 변호사들이 24시간 내 자문을 해주는 방식이다. 김 변호사는 "말 그대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해 길을 열어주는 곳"이라며 "한인사회의 도움으로 성장한 만큼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법을 몰라서 피해보는 한인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며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듯, 이 곳이 답답함을 덜어 주는 쉼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서도 한인사회에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한인봉사센터(KCS) 이사로 활동한 지 6년이 됐고 음악과 춤으로 봉사하는 뉴욕기독예술선교회 이사장도 맡고 있다. 또 매년 두 차례 열리는 탈북난민돕기 음악회에도 기금을 내는 등 한인 커뮤니티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는 "라디오에서 무료 생활상담 코너를 진행하며 한인 이민사회의 애환과 어려움을 항상 느낀다"며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지 고민과 생각이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올해 처음으로 '방법'의 변호사들과 함께 불우이웃 돕기에도 나섰다. 저마다의 눈물겨운 사연을 가진 우리 이웃에게 희망을, 사랑의 손길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지난 5월 자폐를 가진 막내를 포함 자녀 3명을 둔 말기암 환자를 위해 펀드레이징을 시작했으나 기금 모금 시작 2주 만에 돌아가셔서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며 "해마다 5월 가정의 달만이라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 이웃들을 돌아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평소 '불우한' 이웃이라는 한정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내 가까운 이웃, 내 가족으로 바라보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저절로 마음이 동하고 움직이더라"며 "사고·상해 전문 변호사로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채워가고 싶다"고 전했다. 이처럼 김 변호사가 온정을 베푸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또한 어려웠던 한인 이민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6학년 때인 1982년 부모님, 형 둘과 함께 퀸즈 잭슨하이츠로 이민을 와 어느덧 36년을 살아온 그도 이민자의 삶을 잘 알고 있다. 부모는 식당을 운영하며 자식 3명을 키운 이민 1세대이고, 김 변호사와 형제들은 이민 1.5세대로 성장했다. 그는 "나의 뿌리는 한국이고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며 "이민 온 지 3년 만에 한국어를 잊어가는 나 때문에 부모님은 집안에선 오롯이 한국어만 사용하도록 규칙을 만드셨고, 다니던 미국교회에서 한인교회로 옮기며 한인사회와의 접점을 넓혀가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그가 이민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꼽는 것은 '멘토'와의 만남이다. 사춘기 고등학교 시절 잘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한 탓에 고등학교를 5년이나 다녔다는 그를 법조계에서 일하던 아버지 친구 '조셉 라이컨'이란 분이 다독여주고 이끌어 주면서 인생의 큰 변환점을 맞았다고. 김 변호사는 "'지금의 결정이 미래를 결정한다'며 당시의 나를 잡아주고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독려해준 멘토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현재 변호사이자 한 가정의 가장인 나도, 미래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선 내 자녀들에게라도 좋은 멘토가 되고자 늘 대화하고 함께 운동하며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김 변호사는 50년 역사의 초대형 법률 그룹과 합병해 탄생시킨 '샌더스&김동석 법률 그룹'을 통해 사고.상해와 관련 한인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실력 있는 초대형 법률 그룹과의 합병으로 한층 더 전문화되고 향상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게 됐다"며 "한인을 비롯 아시안들의 각종 케이스를 전담한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 브루클린의 한 마켓에서 불법 설치·운영된 승강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고 심모씨 유가족 소송 건도 맡고 있다. 그는 "이 사고는 업주의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된 비극"이라며 "향후 유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인 업주들이 불법.무허가 설비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koreadailyny.com

2018-09-13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웨스트월드 속 AI 탈출 돕는 온정의 공학자…배우 레오나르도 남

다니엘 대 김, 스티븐 윤 등 한인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인 배우 존 조가 주연을 맡은 서칭(Searching)도 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들 유명 한인 배우들의 대열에 인기 드라마 HBO의 ‘웨스트월드(West World)’에서 감초 역할로 주목 받는 레오나르도 남씨도 함께하고 있다. 팬들에게는 인기가 많아 다음 시즌에도 꼭 보고 싶다는 요청이 많지만 정작 한인사회에서는 그가 한인 배우라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씨는 197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6살때 가족과 호주로 이민 갔다가 배우가 되고자 홀로 뉴욕행을 결심한 남씨는 자신을 “글로벌 시민”이라고 말한다. 호주에서 초등학교 재학 중 수업시간에 ‘리어왕’의 독백을 연기하면서 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 부모님의 권유로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대학에서 건축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19세의 나이에 배우의 길을 택해 300달러만 들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으로 올 때 그는 걱정하는 부모님께 그저 괜찮을 거라고 말씀 드리며 왔지만 정작 도착하고 나서는 막막했다고 한다. “가진 돈은 적고 아는 사람은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막했다”는 그는 뉴욕에 도착한 밤, 센트럴파크의 벤치에서 잠을 청했다. 뉴욕에 도착 후 “제대로 된 연기 수업을 받고 싶었다”는 남씨는 우피 골드버그, 매튜 맥커너히 등 유명 배우들을 길러낸 HB스튜디오에서 연기 수업을 받은 후 퍼블릭시어터 등 뉴욕 유명 극단들과 함께하며 내공을 쌓았다. 하지만 꿈에 부풀어 도착한 뉴욕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당시의 뉴욕에는 함께 공감하고 위로가 될 한인·아시안 배우 지망생이 흔치 않아 외롭고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중 ‘스타트렉(Star Trek)’을 통해 접하게 된 조지 타케이는 그에게 희망이자 롤모델이었다. 아시안 배우는 중국음식 배달원이나 사무라이, 엉성한 학생 같은 역 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답답했을 때 이미 오래 전 인기 공상과학 드라마에서 우주선 파일럿의 캐릭터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남씨의 할리우드 데뷔작은 2004년 개봉한 ‘퍼펙트스코어(The Perfect Score)’로 스칼렛 요한슨, 크리스 에반스, 에리카 크리스틴슨과 함께 출연했다. 그 후 영화 ‘패스트&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와 인기 수사 드라마 CSI 등 40편이 넘는 영화∙TV 드라마 등에 출연해 온 그는 웨스트월드에서의 활약으로 인지도를 단번에 높였다. 아시안 연예매체 ‘코레아시안미디어(Kore Asian Media)’는 지난해 아시안 영화인 시상식인 제10회 ‘언포게터블 갈라(Unforgettable Gala)’에서 남씨에게 ‘베스트 액터’상을 수여했다. 웨스트월드는 인간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AI) 로봇들이 ‘호스트’로서 방문객들이 도덕관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유흥과 살인을 일삼을 수 있도록 오락을 제공하는 테마파크가 배경이다. 남씨는 호스트들을 수리하는 엔지니어 펠릭스 럿츠 역을 맡고 있다. 럿츠는 첫 시즌의 겁도 많고 항상 상사에게 꾸중 받는 캐릭터를 탈피해 지난 시즌에는 ‘자각’이 생긴 AI 호스트 메브(탠디 뉴튼)의 탈출을 돕는 주요 캐릭터로 성장했다. 웨스트월드를 포함해 그의 최근 작품 중에는 공상과학이나 장르를 비트는 작품이 많다. 그는 “웨스트월드가 상상 속의 장소이기 때문에 관객을 다소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질문들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너무 현실적으로만 그려내면 반감이 먼저 들지만 공상과학적인 면모를 덧대거나 장르를 비틀면 관객과 작품 사이에 안전거리가 확보된다는 말이다. 웨스트 월드는 인간 투어리스트들이 AI 호스트를 상대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초반에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고 지난 시즌에서는 ‘자각’이 생긴 AI 호스트들의 반란으로 진정한 ‘각성’과 ‘자유의 퀄리티’란 무엇인지 질문해 관객의 심리를 건드린다. 그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이전 작품과 크게 다른 역할을 맡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최대한 다각도로 분석한다. 배우라는 직업이 “불특정 다수인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일이어서 보람차다”는 남씨는 캐릭터를 볼 때 스토리텔링을 하는 역할을 맡으려 노력한다. 최근 합류한 아마존의 범죄 드라마 스니키피트(Sneaky Pete)와 주연을 맡게 된 독립영화 허밍버드(Hummingbird) 또한 캐릭터들이 깊이 있게 다뤄져 촬영이 즐겁다고 한다. 올해 들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과 ‘서치(Searching)’등 아시안 배우들을 전방 배치한 영화들의 성공이 할리우드에 끼친 영향에 대해 남씨는 “머지 않아 워너브라더스 등 대형 스튜디오와 유명 제작사들이 아시안 배우들을 내세우는 작품을 지원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이라 점쳤다. 남씨는 최근 서치 시사회에서 존 조가 “이제는 우리도 이야기를 직접 전하고 주연을 맡을 수 있다”고 한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LA로 거처를 옮겨 연기에 몰두한지 어언 14년. 어머니와 형은 그에게 “코리아 타운이 큰 LA에 가더니 한국 사람 다 됐다”며 놀린다. 하루 일과가 고단했던 날이면 친구들과 순두부 찌개를 먹으면서 회포를 풀고 마음이 헛헛하면 한국식 고깃집에 간다는 그는 “어릴 때 먹고 자란 음식이 소울 푸드”라며 24시간 순두부 집에 자주 들락거린다고 밝혔다. 그가 후배 배우 지망생들에게 하는 조언은 “절대 자신을 믿을 것”과 “항상 자신을 챙길 것”이다. 그는 뉴욕에 도착한 날, 센트럴파크 벤치에서 노숙했던 일을 언급하며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확신이 없었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무명시절을 회상했다. 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챙겨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의식적으로 자주 자가점검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씨는 한국에도 수 차례 방문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으로 “한국의 프로듀서들은 무척 실험적이고 용감하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활동하고 한인 감독들과 일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김아영 기자 kim.ahyoung@koreadailyny.com

2018-09-12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폭력에 맞서는 한인사회 가정 지킴이 역할…김봄시내 뉴욕가정상담소 소장

"한인사회가 서로 도와 폭력 없는 건강한 커뮤니티가 되길 바랍니다." 뉴욕 한인사회의 가정폭력·성폭력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뉴욕가정상담소(KAFSC)의 김봄시내 소장의 희망이다. 1990년 '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가정상담소는 처음 한인 교회의 지하에서 전화기 1대로 두고 시작됐다. 당시 커뮤니티의 중심은 교회였고, 한인들은 가정에서 문제가 있을 때 목회자를 찾아 조언을 구하곤 했다. 약 30년이 흐른 지금, 가정상담소는 24시간 핫라인 상담과 쉼터,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한인사회 가정의 지지대가 됐다. 김 소장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상담사들이, 오후 5시 이후부터는 봉사자들이 상담을 제공해 24시간 핫라인을 풀 가동한다"며 "가정폭력으로 안식처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약 3개월 간 쉼터를 제공, 정부 지원 장기 주택프로그램으로 18개월까지도 쉼터를 마련한다"고 말했다. 가정폭력은 단순한 부부 폭력을 넘어 노부부 폭력, 언어 폭력, 금전적 폭력, 여권 등 신분증을 주지 않는 행위 등도 폭력으로 포함된다. 뉴욕가정상담소는 또 저소득층·싱글맘 자녀, 뉴욕주 아동 보호국에서 넘겨진 청소년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호돌이 방과 후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로 여름.가을.봄에 각각 평균 100명 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또 '청소년 리더십 프로그램'으로 가정 폭력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교육도 진행한다. 김 소장은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단순히 쉼터를 제공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들의 자립을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한다며 "이민·법률 서비스를 제공, '자립'을 위한 직업 프로그램인 영어.제봉.컴퓨터 교육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4년에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쉼터인 '무지개 집'을 인수했다. '무지개 집'에는 지난 2016~2017년 23명의 여성 및 아동에게 잠자리 1000여 회를 제공했다. '무지개 집'은 3년 전 뉴욕시.주에서 130만~140만 달러의 자금을 받아 시설을 확장할 예정이다. 김 소장은 "현재 침대 3개에서 11개로 확장한다"며 "피해자들이 안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넓히고 싶다"고 전했다. 또 뉴욕시 인적자원부(NYC HRA)에서 운영자금으로 230만 달러의 기금을 추가 지원했다. 김 소장은 "규모가 커진 만큼 상담팀을 강화하고 훈련해 주류사회에 걸 맞는 전문적 서비스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고 전했다. 지난달에는 한인 김도우씨의 재단에서도 35만 달러를 후원해, 그 중 10만 달러는 '무지개 집' 재건에 사용될 예정이다. 14일에는 플러싱과 맨해튼 식당에서 '무지개 집'을 후원하는 '일일밥집' 행사도 열린다. 평균 400명이 참가하는 연례 행사로 플러싱 함지박(40-11 149Pl)과 병천순대(156-03 Northern Blvd), 맨해튼 그리운 미스코리아(10 W 32St) 식당에서 오전 11시~오후 3시에 진행된다. 김 소장은 "일일밥집으로 후원뿐만 아니라, 가정.성폭력에 대한 커뮤니티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전했다. 김 소장은 지난 2000년 미국에 이민 와 봉사활동을 찾던 중 반스앤노블 서점에서 가정상담소를 발견했다. 이후 24시간 핫라인 봉사자로 활동을 시작, 홍보물 배포와 법정 통역 등의 일을 맡았고 지난 2015년 소장으로 임명됐다. 또 비영리단체에 사회 기금을 나눠주는 한인커뮤니티재단(KACF)사무총장으로도 일한 경력이 있으며, 현재 한인봉사단체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금융계, 변호사 등 미 주류사회에서 성공한 한인들이 불우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계속 독려하는 것이 포부"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김도우 재단의 후원은 성공한 한인이 비영리단체를 지원하는 좋은 모델이 됐다"며 "많은 사람들이 비영리단체 후원에 참여해 한인사회의 기부문화가 발전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 소장은 또 "최근 미투 운동으로 가정·성 폭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며 이를 "매우 좋은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뉴욕가정상담소는 수년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침묵 행진'을 진행해왔지만, 과거에는 표현하는 것이 사회적 타부로 인식돼 진전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가정상담소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를 제공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다윤 기자 park.dayun@koreadailyny.com

2018-09-11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우리 경제의 미래, 젊은 무역인들에게 달렸습니다" 이학수 뉴저지경제인협회 회장

"뉴저지주에 처음으로 한인들이 정착한 곳은 저지시티입니다. 맨해튼에서 열차로 몇 정거장이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사업이나 전문직 등을 하면서 조용히 지내는 분들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뉴저지주에 한인들이 자리를 잡고 경제적인 기반을 닦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로 팰리세이즈파크(팰팍)와 포트리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뉴저지 한인 경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는 뉴저지경제인협회 이학수 회장은 뉴저지주 한인 경제사의 시초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학수 회장은 1980년대 도미해 현대건설 미주지사에서 총무와 자재구매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생존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위해 서산농장에 영농을 위한 항공기를 구매해 보내기도 했다. 이 회장은 뉴저지주에 자리잡고 1984년 개인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포트리 등 북부뉴저지에 한인 식당이 한 두 군데 있을 정도였다. 이렇다 할 한인 경제라는 것이 없었다. 또 현재 대표적인 한인 타운인 팰팍 또한 당시는 지역경제가 허물어져서 여기 저기 비어 있는 업소가 많았다. "1980년대 중반과 후반을 지나면서 팰팍과 포트리 등에 식품, 요식, 보험, 부동산, 의료 등 다양한 업종의 업소와 전문직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에 삼성과 현대, LG 등 한국 지상사들도 들어오고 소속된 사원들도 많아졌습니다. 팰팍 브로드웨이에 한인 업소들이 많아지면서 거리가 살아났습니다. 한인 경제가 활발해지면서 뉴저지경제인협회가 창립됐는데 처음에는 한인상인번영회나 상공인협회 등의 성격으로 운영 됐습니다. 뉴욕시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가방과 가발 등 사업을 하던 박지원, 김혁규 등 1세대 경제인들이 주도한 뉴욕경제인협회와 비교할 때 10년 정도 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 1세대 경제인들이 주도했던 경제인협회는 창립 이후 상당 기간 회원수가 30명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13대와 14대 변효삼 회장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면서 뉴저지경제인협회가 한국 세계무역인협회(World OKTA.월드 옥타)의 뉴저지지부로 등록하면서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15대와 16대 박명근 회장 시기를 지나면서 회원수가 80명에서 90명 가까이 늘었고, 17대 손호균 회장 대에는 '차세대 육성'을 목표로 한인 젊은 무역인들을 후원하는 사업에 본격 착수하면서 뉴저지 한인 경제는 물론 조국의 경제 발전에도 나서는 단체로 급성장했다. 특히 음주측정기 등을 미 주류사회와 군대에 납입하던 손 회장은 한인 경제의 발전은 무역업 등을 중심으로 차세대 한인 젊은 사업가들의 육성에 달려 있다고 믿고 차세대 창업무역스쿨 등 미래 지향 사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제가 18대 회장을 맡아 올해와 내년 2년간 임기를 수행하게 됐는데 1년 동안 거의 매달 다양한 사업과 함께 협회 예산만 40만 달러 정도를 소화하는 큰 단체가 됐습니다. 회원수가 정회원 150명 정도에 40세 이하의 젊은 차세대회원 50명 정도를 합쳐 200명 정도인데 정회원들의 연령별 분포는 60대 이상이 30%, 50대가 55%, 40대가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특히 미래의 주축으로 성장할 젊은 무역인들이 조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현재 협회 차세대 회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무역인들은 한국의 도 또는 시 마다 조성돼 있는 테크노파크 등에서 생산되는 중소기업 제품들을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젊은 사업가들이 수출 증대에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인식해 2박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차세대 창업스쿨에 재정 지원을 하는 등 적극 후원하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 산하 산업자원통상부는 회원 수 1만여 명으로 세계 각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가진 월드 옥타 조직을 구축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한상'을 목표로 각국의 젊은 무역인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차세대 회원들이 지금은 중소기업 제품 한 두 가지를 한국에서 가져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팔고 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들이 수입하는 한국 상품의 양이 늘고 사업경험이 쌓이게 되면 큰무역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중소기업은 물론 국가경제, 더 나아가 뉴저지 한인경제, 한인경제인협회 모두가 다 발전할 수 있게 됩니다. 협회가 차세대 회원, 젊은 무역인들에 크게 관심을 갖고 기존 회원들이 사업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장기적인 안목으로 후원하고 관리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뉴저지주 한인 경제의 발전은 경제인협회 회원들 200여 명의 발전과 함께 개별 산업과 사업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경제인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실질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 중반 포트리에서 보험과 투자사업을 시작하면서 당시 한국 10대 지상사, 이후 30대 지상사로 불리는 회사들 거의 90%를 제가 고객으로 유치해 관리했습니다. 그 후에 사업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 현재는 상용과 사업체 매매를 중점으로 하는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과 사업 경험으로 볼 때 한인들이 미국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봅니다. 하나는 '자기계발' 이고 또 하나는 '정직' 입니다." 이 회장은 어떤 사업을 하든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장과 고객 등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변화하는 사업환경을 이기고 다른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매일 스스로를 계발하는 부지런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사업가로서 경제인으로서 고객에 대해, 자신의 사업에 대해 정직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이든 상관없이 남보다 부지런하고, 반걸음 앞서 나가면서 발전, 변화, 혁신하면서 정직하게 사업을 하면 안될 리가 없을 겁니다. 정직을 바탕으로 근면하게, 남보다 열심히 일하면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 회장은 협회 활동과 함께 커뮤니티 봉사와 헌신에도 열심이다. 뉴욕한인회 제24대 이정화 회장 때 대내담당 수석부회장을 지냈고, 뿌리교육재단 이사를 거쳐 2010년부터 2011년까지 5대 회장을 역임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뉴욕대(NYU) 대학원을 졸업한 이 회장은 2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국선도 수행과 함께 매년 미 전국에 있는 지인들과 함께 명산을 찾아 며칠씩 함께 지내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산행과 함께 특히 35년 동안 골프를 즐겨 현재 싱글 수준의 핸디를 유지하고 있는 준 프로 수준의 골프 마니아이기도 하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09-10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에 보람 느껴요" 김재연 이노비 사무총장

"소외된 분들을 돕는 것이 한 발 더 나아간 신선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7년간 한인사회의 구석구석을 찾아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문화로 행복을 전한 김재연 사무총장의 말이다. 이노비(EnoB.대표 강태욱)는 지난 2006년 뉴욕 맨해튼에 설립돼 노숙자, 환자, 장애인, 어린이 등 사회 소외계층에게 공연을 제공하는 문화 예술 비영리단체다. 이노비는 '변화를 이끄는 아름다운 다리(Innovative Bridge)'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주로 입원 환자, 장애인, 사회적 배려 대상자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음악 콘서트를 선보인다. 컬럼비아대, 뉴욕대 등 대학병원부터 어린이병원, 암 병원 그리고 호스피스 병원까지 소외 계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또 한인들을 위해 COCO 장애인센터, 뉴욕.뉴저지 밀알 선교단, 은혜가든, 재미교포특수지원센터(KASPED), 뉴저지초대교회, KCS 코로나 시니어센터 등 약 20곳의 한인 양로원, 장애인 단체, 병원, 교회 등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올해는 '윌리엄 앤 문자 오졸렉 파운데이션'의 후원으로 장애인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인 '이노비 음악 교육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지난 4월 맨해튼 할렘의 장애인 초등학생 11명을 대상으로 10주 동안 합창수업을 진행했고, 어린이들이 인근 양로원에서 공연을 펼쳤다. 김 사무총장은 "평소 사랑 받지 못했던 어린이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며 "처음에는 대답도 안하고 눈도 안 마주치던 학생들이 시간이 지나자 봉사자들에게 안기고 적극적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등 태도 변화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가을 맨해튼 할렘지역과 퀸즈의 저소득층, 장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공연을 진행한다. 김 사무총장은 이노비의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2년 전 한 브롱스 소재 호스피스 병원에서 진행된 꽃꽂이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임종을 앞둔 분들과 가족들은 웃을 일이 많이 없지만 잠시나마 꽃으로 힐링을 시켜주고 싶었습니다. 한 환자는 이에 '꽃꽂이를 한 날이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간 첫 날이었는데 정말 좌절되는 순간에 많은 힘이 됐다'고 고마워 했습니다." 또 이노비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아트 테라피 프로그램도 설명했다. 이는 일터와 사회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반 한인 직장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김 사무총장은 "한인 직장인들도 미국 주류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언어, 문화 등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지금까지 40~50여 명이 참가했고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고 설명했다. 이노비에서 소외계층을 위해 일한지 벌써 7년이 되는 김 사무총장은 중국 명문대인 북경대 금융학을 전공했다. 그는 "항상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과 중국도 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하버드대 평생교육원의 비영리 경영전문 과정을 수료했고 2011년부터 이노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노비 시작 때는 지금처럼 인지도가 없고 후원금도 없어 봉사자에게 사례도 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그간의 노력으로 후원자도 많이 생기고 이제는 먼저 봉사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다"며 "컬럼비아대, 뉴욕대, 디자인학교 SVA, 요리학교 CIA 등 뉴욕 주요 대학 한인 학생회들도 적극적으로 봉사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노비의 성장은 질 높은 공연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한인들의 정서적 지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 사무총장은 "한 복지센터의 한인이 자신은 평소 소수인종으로 기가 눌려있지만, 이노비가 전문가들을 데려와 공연을 할 때면 미국 사람들까지 몰려와 자랑스럽고 우쭐할 때가 많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이노비는 현재 뉴욕 본사와 한국, 중국 지사가 있지만 향후 지역을 더 확대할 계획이다. 김 사무총장은 "한국에서는 북한, 일본으로, 뉴욕에서는 전 미국 지역과 아프리카 유럽까지 뻗어나가 사회 소외계층을 찾아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까지 뉴욕 한인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이노비가 성장할 수 있었다"며 "나아가 젊은 세대도 기부나 봉사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비영리단체나 사회 환원에 기여해 한인 기부문화가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는 "작은 것에 소중함과 행복함을 느낀다"며 "사람들이 이노비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보람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박다윤 기자 park.dayun@koreadailyny.com

2018-09-07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한국 자수의 세계화를 꿈꾼다…정영양 설원재단 대표

"한국 섬유 전문가들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문화교육지원 비영리단체인 설원재단(Seol Won Foundation)의 대표 정영양 자수박사가 '2018년 텍스타일 기능교환 프로그램'에서 한 말이다. 정 대표는 한국 자수의 세계화와 문화 리더를 키우기 위한 비전으로 50년 전 한국에서 설원재단을 설립했다. 설원(눈 정원)이라는 이름은 '깨끗한 마음'을 비유하는 뜻으로 붙여졌다. 재단은 지난 21~25일 맨해튼에서 '2018년 텍스타일 기능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올해 첫 번째로 진행된 여름 프로그램에는 한국 원광디지털대학교 학생인 섬유 전문가들과 미국자수협회 단원들이 초청돼 직접 만든 작품을 선보이고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또 현재 18·19세기 자수가 달린 종교 의상을 전시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미국 내 한국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자수 콜렉션을 진행하고 있는 뉴왁박물관 등을 방문했다. 정 대표는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한국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고 미국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이디어 공유와 창작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자수에 흥미가 있는 새로운 세대를 양성해 나가고 자수가 규방공예를 넘어 국제적인 예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정 박사는 프로그램을 연례 행사로 진행할 계획이다. 정 대표는 평생을 "바느질로 예술을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자수가이자, 교수, 섬유 역사가, 수집가, 예술가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자수를 처음 배웠고 초등학교에서도 서양식 자수를 배웠다. 또 한국 전쟁으로 충청도로 피난을 갔을 때 주민이 100명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생필품들을 모두 직접 만들며 실력을 키웠다. 13세부터 지역 주민들에게 서양 자수와 한국 전통 자수를 가르쳤다. 이후 전쟁 후 1965년에 서울 원효로에 '국제 수공예학원'를 건립해 여성들이 자수를 배워 생계로 이어갈 수 있도록 교육하기도 했다. 정 대표가 본격적으로 '한국 자수의 세계화'에 가담한 것은 1967년 도쿄에서부터다. 그는 일본 수공예협회의 초청으로 도쿄에서 한국 자수를 소개하는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명성을 얻어 1969년에는 이란 테헤란서 개인전을, 1969년 말에는 이집트 개인전을, 1970년부터는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콜로라도, 볼티모어, 뉴욕 등지에서 활동했다. 한국 자수의 세계화를 향한 길이 항상 순탄했던 것 만은 아니다. 당시 주류 예술은 페인팅이나 조각 등에 집중해있었고, 자수는 여성의 일이나 규방예술로 간주됐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뉴욕대학교(NYU) 재학 시 교수와 상의해 인기가 없던 '동양자수' 과목 이름을 '섬유미술(Fiber Art)'로 변경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고, 자수를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 졸업 전시 작품에 '만져보세요(please touch)'라는 사인으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이후 1970년대에 그의 대표 저서인 '동양 자수의 근원과 역사적 발달'과 '동양자수의 예술' 등을 발간했고 1980년대에는 '중국·일본·한국 동양자수의 발달과 기원'을 출판해 동양 자수를 국가와 시대별로 분석했다. 그의 저서들은 여전히 섬유예술계에서 참고 문헌으로 쓰인다. 2004년 정 박사는 평생 제작한 작품과 콜렉션 1000여 점을 한국 숙명여대에 기증해 한국 유일 자수 박물관인 '정영양 자수박물관'을 개관했다. 중국 전국시대 견사자수가 있는 청동거울을 포함해 일본 기모노·몽골 예복·터키 방장 등 다양한 의복과 장신구들을 전시했으며, 특히 한국에서 볼 수 없던 동남아시아의 용포, 중국 황제 옷 등의 궁중의상을 기증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구글 아트 앤 컬쳐 에듀케이션(Google Arts& Culture Education)'에 선정돼 첨단기술 3D 카메라를 통한 온라인 작품 감상도 가능하게 됐다. 정 박사는 "정영양 자수박물관을 통해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 섬유 전문가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뉴욕에서는 설원재단을 통해서 한국 자수의 세계화와 문화 리더 양상을 위해 힘쓰고 있다. 정 박사는 "설원재단의 이번 여름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유사한 프로그램의 증진을 통해 동서간 문화적 이해증진, 후학 양성, 자수 보급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은 모두 무료로 진행되며, 주로 개인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그는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섬유 공예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자신을 "실과 바늘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수는 깨끗한 예술이라 좋다"며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을 때마다 마음과 몸이 정결해진다"고 웃으며 말했다. 박다윤 기자 park.dayun@koreadailyny.com

2018-09-06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한인 교회,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있다" 김창길 NJ교회협 역사편찬위원장

뉴저지 한인 기독교인들의 단체인 뉴저지한인교회협의회 31년 전인 1987년 창립 이후 200여 개가 넘는 한인 교회를 대표하는 구심체로서 크고 작은 행사와 활동을 펼쳐왔다. 최근 뉴저지교회협은 역사와 사료의 중요성을 인식해 곳곳에서 흩어져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모아 역사편찬전시회를 여는 등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데 나서고 있다. 교회협 역사편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창길 목사는 이러한 역사 세우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쓴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his) 이야기(story)를 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이야기는 뉴저지교회협의 이야기들이며 다시 그의 이야기는 뉴저지 교회들이 지향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행적을 통해 선배들의 고민과 개척정신, 신학 비전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뉴저지 교회들은 선배들의 눈물의 기도와 피나는 고통의 노력과 인내로 이루어진 것인데 초창기 시절 이민 개척교회를 모르고 지금의 교회 실상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뉴저지교회협이 최근 잉글우드에 있는 뉴저지연합교회에서 개최한 역사편찬전시회가 뉴저지 한인교회 역사의 처음과 끝, 안과 밖을 들여다 보는 중요한 행사였음을 강조한다. 전시회에는 뉴저지교회협이 매년 실시하는 3대 주요 행사인 신년하례 예배, 부활절기념 새벽예배, 호산나 전도대회 등을 중심으로 포스터와 행사 안내서, 정기총회 회의록, 회지 등 각종 자료를 망라하고 있다. 또 뉴저지교회협의 오늘을 있게 한 전직 회장 등 관계자들의 얼굴과 단체 사진을 정리했고, 30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9.11 테러 참사 때 뉴저지교회협이 개최했던 추모예배 순서지 등 희귀자료도 공개했다. 김 위원장은 "뉴저지 교회들은 대뉴욕지구교회협의회에 속해 있다가 뉴저지 지역의 교회 수 증가와 거리상의 불편, 지역 특성의 차이로 분리를 추진해오다 1987년 창립총회를 열고 독자적인 역사를 쓰게 됐다"며 "최근 역사 정리 사업은 회장인 윤명호 목사가 임기 중 앞으로 4년 뒤까지 포함한 35년사를 쓰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자료수집 결정을 내리고 사업에 착수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정리 과정에서 주인공 개개인들이 갖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한인 교회의 지난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미래 교회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아서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가 35년사를 쓰려고 하는 것은 과거의 행사의 나열이나 지난 날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미래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예수의 복음이 바로 선포되는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 역사를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너무 많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자료들이 없어진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뼈아픈 것은 교회협 활동의 핵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총회록이 3분의 1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15회기, 17회기, 20회기 등 총 10회기 정도의 총회록은 확보됐으나 나머지 20회기 정도의 총회록을 결국 찾지 못했다. 한편에서는 10회기 정도의 총회록이라도 확보한 게 다행이라고 하지만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김 위원장은 "전체 중요 사료를 모두 확보하지 못해 정말 아쉽고 안타깝지만 일단 1차적으로 교회협 31회기 동안의 약사를 조만간 발행한 뒤에 추가로 적극적인 사료 수집에 나서 이를 바탕으로 교회협 35년사를 발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 위원장은 팰리세이즈파크에 있는 뉴저지장로교회에서 1980년부터 2010년까지 31년간 목회를 한 후 은퇴한 뉴저지 한인교회의 산 증인이자 산 역사다. 교회협 출범 초기에 4대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뉴저지장로교회 원로목사 겸 개신교수도원수도회 원장을 맡아 여전히 열정적인 활동으로 오늘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09-04

[한인 이민역사를 쓴다]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팰팍 만들고 싶다" 권혁만 팰팍한인유권자협회 회장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팰팍)는 뉴욕시 메트로 지역에서 대표적인 한인 밀집지역이다. 한국 행정구역 단위로 말하면 '동' 정도 되는 자치단체로 타운 전체 인구 중에 절반 정도인 1만 여명 정도가 한인이다. 2010년 센서스 기준으로는 전체 인구 1만9622명 중 한인이 1만115명(51.5%)으로 미 전국에서 한인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자치지역이다. 뉴저지에서 2위는 레오니아(26.5%), 3위 리지필드(25.7%), 4위 포트리(23.5%), 5위는 클로스터(21.2%)다. 뉴저지주의 대표적인 중산층 동네인 팰팍에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대다. 이 때부터 타운 곳곳에서 한인들의 주택 매입이 본격화됐고, 브로드애비뉴를 중심으로 하는 상가들에 속속 한인 업주들이 자리를 잡았다. 빈집이 듬성듬성 보이며 죽어가던 타운이 활기 있는 타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90년 이후는 팰팍이 한인들로 인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그러나 한인 인구가 늘고 상가의 상당수 업주가 한인들로 바뀌면서 시정부와 한인 커뮤니티와의 감정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시위와 법정소송 등이 잇따랐다. 2010년을 지나면서 팰팍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으로 자리잡았으나 팰팍 정치권에서의 한인 영향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이런 와중에 한인들의 정치력 향상과 차세대 정치인 양성을 위해 본격적인 정치그룹이 탄생했는데 바로 팰팍한인유권자협의회다. 지난 2016년 창립돼 현재 10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활동하고 있는 유권자협의회 권혁만 회장은 단체가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팰팍에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인구나 타운 재정에서 주류인 한인들이 타운 정치와 행정 등에서는 소외되고 불이익과 차별을 받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권 회장은 결국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동력은 타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한인들이 힘을 합쳐 각종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 한인들의 입장을 지키고 지지할 수 있는 정치인을 뽑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권자협의회 활동이 순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인들이 물 밑에서 조용히 유권자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운동을 하고 있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여기 저기서 압력과 방해가 들어왔다. "타운 거리 축제 때 타운홀 앞에서 유권자 등록캠페인을 하겠다고 신청하면 허가를 해주지 않은 일도 있고, 심지어는 이웃에서의 신고를 이유로 불법이니, 소음이 시끄럽다니 하면서 조사를 나오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권 회장은 이런 어려움을 현재 미국 최대 민권단체 중 하나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캘리포니아주 LA지부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의 도움으로 이겨냈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단체가 나가야 할 방향이 올바르고 활동이 활발해지자 한인 주민들의 호응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한인 유권자를 결집하는 운동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 번 행사를 할 때 50명, 100명씩 무더기로 회원들이 가입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물론 현재 팰팍에 사는 한인 유권자 수 3700명 중 1000명 정도만 가입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가지고도 지난 6월에 지역 민주당 시장후보 경선에서 한인 크리스 정 후보를 당선시키는 쾌거를 달성했습니다. 민주당은 그 동안 당내 실력자가 후보를 정하면 그대로 되는 시스템이었는데 타운이 설립된 지 무려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 당내 경선을 거쳐 한인 후보가 당선되는 역사적인 일이 생긴 겁니다." 그러나 유권자협의회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을 바라보고 있다. 올 11월 선거에서 크리스 정 후보의 시장 당선은 물론 시의원 2명도 정치적 이익이 아닌 주민을 먼저 생각하는 후보를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 권 회장의 생각이다. 유권자협의회는 이러한 현실 정치와 함께 풀뿌리 정치 단계에서부터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도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권 회장은 "현재 교육위원에 나오실 실력과 명망을 가진 한인 후보 서너 분이 계신데 다들 능력과 자질이 뛰어나고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분들"이라며 "이런 분들을 후원해서 먼저 교육위원에 당선되게 한 뒤에 시의원, 시장 등을 거쳐 그 이상 레벨의 정치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권 회장은 유권자협의회의 활동이 어느 누구와 대립·충돌하고, 한인들만이 집단 이기주의, 소수 실력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팰팍에 살고 있는 주민들 모두가 정당하고 민주적인 대우를 받고 후세에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정치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한인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단체의 활동 목표 중 가장 큰 부분이 유권자등록 캠페인, 각종 선거의 홍보와 참여, 차세대 한인 정치인 양성과 후원 등 세 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인종적 충돌이나 배타적 이익 추구가 아닌 너도 나도 살고 싶어하는 팰팍 타운을 만들고 싶은 일념하에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권 회장이 대가 없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런 활동을 하는 배경에는 종교적인 헌신으로 단련된 그의 인생 역정이 크게 작용을 하고 있다. 한국의 충북 단양에서 출생한 권 회장은 30대 중반 아르헨티나를 거쳐 1999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의류사업과 부동산 사업을 했던 그는 테너플라이에 살다 지난 9년 전 팰팍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권 회장은 살면서 현재까지 60여 년 가까이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성당과 요양원, 병원 등 사회복지 단체에서 열정적인 봉사활동을 해왔다. 권 회장은 "외아들이 여느 젊은이와 달리 돈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유권자협의회를 결성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속내를 바로 아들이 걷고 있는 길로 설명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

201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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